에베소 현대의 뉴욕 같아 당시 종교 상업의 중심지
은장색 업자 ‘아데미의 신상 모형’으로 막대한 이익
아이러니 아데미 기독교 공인후 성모마리아로 대체
사도요한도 이곳서 ‘요한복음·요한서신·계시록저술
▲ 사도 바울은 복음을 힘차게 전하고, 여러 기적을 행하며 에베소 사람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강력하게 책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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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사도행전 19:24-29)
▲ 에베소(Ephesus)인들의 아데미(Artemis) 여신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신으로 부상하며,로마제국 시대에 가장 숭배 받았던 여신으로 알려져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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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미 여신! 로마제국시대까지 가장 숭배
에베소(Ephesus)인들의 아데미(Artemis) 여신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신으로 부상하며, 로마제국 시대에 가장 숭배 받았던 여신으로 알려져 왔다. 아데미는 로마에서는 다이애나(Diana), 이집트에선 이시스(Isis) 라고 불리워졌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힘차게 전하고, 여러 기적을 행하며 에베소 사람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강력하게 책망하였다. 그 결과로 우상제작 업자들의 경제적 수입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바울과 일행은 아데미 전각의 은장색 조합의 우두머리인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는 대소동으로 곤욕을 치르게 된다.
▲ 데메드리오는 은으로 아데미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상당한 돈벌이를 하게 하였다. 제법 광범위한 지역에서 아데미 숭배가 자행되었기에 데메드리오가 이처럼 동업자들을 모아서 데모를 부추길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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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에베소 외에도 32곳이나 되는 곳에서 아데미 숭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데메드리오는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상당한 돈벌이를 하게 하였다. 제법 광범위한 지역에서 아데미 숭배가 자행되었기에 데메드리오가 이처럼 동업자들을 모아서 데모를 부추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을 살펴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였을 때 사람들로부터 많은 귀신들을 쫓았으며 마술사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대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의 권위가 실추되어 힘을 잃고 더 이상의 세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복음이 전파되면 될수록 ‘아데미’ 모형을 사려는 사람이 적어짐으로 인해 결국에는 신전의 권위가 추락하니, 이는 응당 자신의 이익 유지와 직결되니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아데미 여신이 이슬람의 영적 뿌리에 달의 여신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달의 여신 아데미의 상징은 초승달인데, 이 초승달은 모든 무슬림 국가의 깃발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모스크에서도 상징으로 되어 있다.
▲ 소아시아 지역인 터키의 에페수스(성경은 에베소)는 예수가 탄생하기 전부터 번성한, 당시의 아테네와 로마에 필적할 만한 항구도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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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 당시 아테네와 로마에 필적하는 항구도시
성경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의 핵심 선교지가 바로 에페수스다. 터키에서 에페수스는 셀주크(Selcuk)라 불린다. 더불어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도 ‘아데미’란 이름으로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신약성경 ‘에베소서’나 요한계시록의 수신지로 소아시아 7교회 중 하나로 등장한다.
소아시아 지역인 터키의 에페수스(성경은 에베소)는 예수가 탄생하기 전부터 번성한, 당시의 아테네와 로마에 필적할 만한 항구도시였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수많은 국제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서기 1세기 당시 상업과 종교의 도시 ‘에베소’에는 최소한 약 22만5천의 주민이 있었다. 현대의 뉴욕 같은 도시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집필했던 시절 에베소는 세계 각국에서 온 상인들이 식품, 향료, 옷감, 각종 금은보석, 도자기 및 노예 판매까지 온갖 상품을 거래하는 대형 시장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에베소라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의 주변에는 순례자와 여행객들을 상대로 음식이나 기념품, 제물 등을 팔고 숙소를 제공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장사꾼들과 행상들이 득실거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수입이 좋은 장사는 아데미 여신의 은감실, 즉 은으로 만든 아데미의 신전 모형물을 파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기념품이나 호신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19장 29절의 ‘연극장’라고 하는 장소가 바로 아데미 신전이다. 2만5천명을 수용하는 대극장을 비롯하여 경기장과 체육관, 음악당, 도서관, 목욕탕 등 각종 편의시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사도행전 19장 29절의 ‘연극장’라고 하는 장소가 바로 아데미 신전이다. 2만5천명을 수용하는 대극장을 비롯하여 경기장과 체육관, 음악당, 도서관, 목욕탕 등 각종 편의시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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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풍요로웠던 이 도시의 ‘아데미의 전각’ 즉 아데미 여신의 신전은 BC 550년에 만들어졌다가 BC 356년에 ‘에로스트라토스’라는 이름을 가진 정신착란증 환자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후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치세중(기원 138-161년)에, ‘에베소’의 상당 부분이 복구되었다.
훗날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고 6세기 중엽 말라리아 병이 퍼지며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도시를 떠났고 12세기 회교도 터키인들의 공격으로 남아 있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도 정든 도시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 ‘아데미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리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로 여겨지는 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라크의 바벨론에 있는 세미라미스의 공중 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하리카나서스의 화려한 무덤, 알렉산드리아의 파라오, 로도스의 거대한 골로새 동상 그리고 바로 이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이다.
에베소에 있는 아데미 신전은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의 후원으로 세 번째 지어진 신전으로,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기둥의 높이는 두 배, 크기는 네 배나 큰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길이 137m, 너비 69m, 높이 18m에 127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터와 지름 2m의 돌기둥 하나만이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 최대 규모를 자랑한 아르테미스 신전이지만, 19세기 들어서기까지 구체적인 위치가 어디인지 수수께끼였다. 1869년, 6년간의 탐사 끝에 아르테미스 신전을 발견한 것은 영국 고고학 팀이다. 영국 고고학 팀이 밝힌 원래 신전의 조감도를 보면, 전방 기둥 8개, 측방 기둥 20개로 이뤄져 있다.
얼마나 큰지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파르테논은 전방 기둥 8개, 측방이 18개다. 길이는 전방이 31m, 측방이 70m 정도다. 건립에 필요한 모든 석재는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10여㎞ 떨어진 대리석 산에서 채굴됐다. 또한 고고학 탐사에서는 ‘아데미’ 신상이 들어 있는 ‘아데미’ 신전이 묘사된 동전도 발굴되었다.
무수의 유방을 소유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데미는 아기를 잘 낳게 해주고 다복을 준다는 풍요의 여신으로 로마시대엔 다이아나(Diana)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데미’의 축제에는 소아시아’ 전역에서 수십만명의 방문객이 그 도시로 몰려들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에는 거세된 제사장들과 젊은 처녀들을 중심으로 매년 한 달 동안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는 의식들이 행해졌다.
축제의 한 가지 현저한 특징 하나는 환호하는 행렬이었는데, 이 행렬 중 ‘아데미’ 신상의 행진이 있었다. 맹신자들이 여신상을 어깨에 메고 “위대하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고 외치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사도행전 19:34)
▲ 아데미 여신은 기독교 안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극적으로 회생하게 된다. AD 431년에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대체되어 버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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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미가 성모 마리아로 대체되다.
AD 391년에 이교적 행위를 전면 금지되고, 392년에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기독교가 국교로 정착되면서 유일신에 어긋나는 이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기독교도들의 눈에 아르테미스 신전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우상의 상징으로 비쳤다. 당시 에베소 시민들의 대부분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믿는 신봉하는 사람들이어서 아데미 신전은 당연히 명맥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미 여신은 기독교 안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극적으로 회생하게 된다. AD 431년에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등 에게해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섬기던 대모신(大母神)인 아데미(Artemis) 신(神)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대체되어 버린 것이다.
AD 43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2세가 에베소의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열린 에베소 3차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 때문이다. 이 에베소 공회에서 내렸던 중요한 결정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던 마리아를 데오토코스(Theotokos) 즉 ‘하나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에베소 공회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넘어 마리아를 신적인 존재로 경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사라졌던 여신 숭배가 마리아 숭배를 통해 위장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을 어머니와 아들로 연결시켜 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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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에베소는 기독교도들을 위한 성지순례지로도 유명하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 성모 마리아가 피난해온 곳도 에베소였다.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마리아는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마리아가 평생 기도로 보냈다는 작은 집이 에베소 도시를 내려다보는 산 위에 들어서 있다.
사도 요한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는 어떤 인연을 깊게 맺고 있었을까?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이후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였다. 그리고 그 이후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을 어머니와 아들로 연결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임종하기 직전에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아와 요한을 보고 먼저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요한에게는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하고 말하며,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였다. 이때부터 요한은 임종 때까지 평생 마리아를 곁에서 모시고 섬겼다(요한복음 19:26-27)
AD 95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탄압 때 요한은 군병들에게 붙잡혀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저술하다가, 96년 도미티아누스(omitianus)가 암살되자 사면 받아 에베소로 귀환하여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을 저술하였다.
도미티아누스(재위기간 AD 51-96년) 황제 시대에 로마 제국 전역에는 엄청난 박해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으로 유배당하게 된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머무는 동안 기록한 책이 요한계시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