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사에서
봄 꽃은
느리게 오르고
가을 단풍은
빠르게 내려온다 했겠다
고즈넉한 산사의 새벽
식전 세 잔의 차는
해탈로 가는 지름길이라며
심성 묻은 미소 건네는 노승
따사론 눈길
승방 가득 들어차더니
한 잔은
찻잎 딴 이 정성 얻기 위해 마시고
둘 째 잔은
차가 지닌 향 얻기 위해 마시고
세 번째 잔은
해탈을 얻기 위해 마신다던가
안즉은
이슬도 채 깨지 않은
새벽 산길 거슬러 오르자니
부지런한 박새 두 마리
기척에 놀라 깃 푸덕이다가
이내 덤불숲 자취 숨기누나
천년 장송 허공 치솟아
속세 찌들은 허리 굽어
하마 늙은 객
허망한 한숨일랑
가소로운 짓거리라
짐짓 조롱하는 듯
세월은 이리 가건만
계절은 저리 오건만
새벽 산사는
그윽한 솔향기 뒤집어쓰고는
여전히 제 자리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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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note
그래, 역시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슬금, 가을이라는 녀석은 습격처럼 올 해도 나를 찾아왔다. 지난 해에도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매정하게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급히 도망가더니만 그예 이렇듯 다시 오고야 말 것을. 어찌 그리 돌아서는 폼새는 매몰차고 단호하던지. 그러니 올 해 다시 찾는 발걸음이 그리 쑥스럽고 계면쩍은 것 아니더냐? 그래도 옛 친구 발자국 소리마냥 이리도 반갑고 정겨운 냄새 흠씬 담고 찾아주니 여간 반갑고 고마운 노릇이 아닌지라, 오늘도 필자는 속내에 함박웃음 가득하다.
지난 주말, 모처럼 짬을 내서 전에 즐겨 찾던 산사를 찾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서둘렀기에 채 여명도 되기 전에 한 걸음인지라 혹여 누가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웬걸, 어찌 알고 기다리고 있던 참인 듯 댓돌 아래로 성큼 내려서시는 스님의 넉넉한 인품에 하얀 입김 달고 찾은 객이 무안함도 잊고 두 손 잡아 해후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미 한 차례 독경도 마치시고 곧 아침 공양 직전이라며 굳이 별채에 마련된 식당으로 끌어당기시는지라 선뜻 동석하여 담백한 아침 식사와 차를 대접받았다.
길게 앉아 있을 터수는 아니라서 다시 오마고 윤회의 인사를 나눈 후에 뒷길로 이어진 산을 올랐다. 어느새 가을이 땅 속 곳곳에 뿌리를 박아 온통 가을 냄새가 진동하는 산길을 따라 세월을 한 자락씩 음미하며 걷다보니, 아무도 없는 산 속에 마치 수많은 인연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소란스럽고 와글와글한 바람과 구름과 햇살과, 그리고 가을 숲이 필자에게 곁을 내준다.
이제 이어지는 올 추석 지나고나면 또 빠른 걸음으로 가을은 달려가겠지. 그리 넉넉하지 않게 남아있을 필자의 가을 이야기 하나가 그렇게 다시 스러져갈테고. 그래도 달착지근한 추억 하나 쯤 일기장에 적어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어지간하면 전혀 생각지 않았던 반가운 만남이라도 하나 불쑥 이루어져 기적이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하고 감격하는 가을이라면 참 좋을텐데 말이다.
그러니 이 가을에 뭘 어떻게 생각하고 처신을 해야 그나마라도 후회가 덜한 계절 인연이 될까 고민하면서, 되돌아 내려오는 하산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짐짓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본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갈수록 누군가에게 짐이 되거나 부담을 주는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권면하며 아울러 다짐을 해본다.
혹여 인연을 핑계로 기대려고만 하지는 말아야겠다. 나 또한 그런 인연 싫어할테니까. 우정을 핑계로 기대려고만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우정 거부할테니까. 또한 사랑을 핑계로 기대려고만 하지는 말자. 나 또한 그런 사랑 미워할테니까. 그리고 슬픔을 핑계로도 기대려고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슬픔 비웃을테니까. 아픔을 핑계로 기대려고만 하지도 말고. 나 또한 그런 아픔 못 믿을테니까. 내가 원치 않는 건 남도 원치 않는다. 오죽하면 성인들이 황금률을 말할까?
‘황금률(黃金律)’은 수많은 종교와 도덕,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원칙의 하나로, ‘다른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는 윤리 원칙이다. 역사적으로는 17세기부터 황금률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세기의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금률이 ‘하라’라고 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적극성인 권고인데 반하여, 외전에서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라”의 ‘말라’라고 하는 소극적인 가르침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상처를 받으며 자라나는 꽃과 같다. 비 바람을 맞지 않고 자라나는 나무는 없다. 우리의 살아가는 길에는 수 많은 비와 바람이 다가온다. 때로는 비 바람에 가지가 꺾어지듯이 아파할 때도 있다.
그러나 비와 바람을 견디고 핀 꽃이 아름답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사실 사는 게 매 번 아프기만 한 건 아니라 언젠가는 아름답게 피어나는 날이 있다. 소망처럼 다가오는 그런 날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오늘 또 하루가 지나간다. 사는 건 상처 자체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아픔은 나를 더 깊고 아름다운 삶의 꽃이 되게 하는 과정이다. 하루를 소중히 사는 사람은 내일의 기약을 믿고 산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며 살아가게 될 그 날들을 위해서 말이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 서로를 소중히 아끼며 살아야 한다. 타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타인을 소중히 해야 한다. 나보다 먼저 항상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넓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이 한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면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며 좀 더 따스한 마음으로 감싸가야 한다. 지적하고 질타하기는 쉽다. 그러나 감싸주고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양보와 화합이 곧 평화와 행복을 일구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세상, 온갖 풍파와 거센 물결이 몰아치는 세상, 생각하면 한숨만 절로 나오는 이 세상, 하지만 아직은 마음 따뜻한 이들이 있기에 살아 볼만한 세상이지 않은가 싶다. 진정 나 자신부터 마음 따뜻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 어떠한 것도 감싸안을 수 있는, 우주와 같은 넓은 마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면, 그래서 남보다 먼저 나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인정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세상에 안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를 알고 나를 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제언한다. 우선 ‘일단 부딪치자.’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 세상 밖에 모른다. 용기있는 능동적인 행동이야 말로 나를 알고 나를 보는 기본이 된다. 그리고 ‘도전하자.’ 암울한 과거에도 빛을 찾아 도전했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듯, 불투명한 미래도 도전하는 자에겐 열린 길이 된다.
다음 ‘용기를 가지자.’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만 하며, 창가에 서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부러운 듯 보고만 있으면 바깥 세상은 나의 것이 안 된다. 양치부터 하자. 그리고 나서자. 그것이 시작이다. 다음으로 ‘자신감을 가지자.’ 아무도 나의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 신고 있는 신발의 브랜드 같은 덴 관심 없다. 중요한 건 나의 내면에 있는 생각이다. 나는 충분히 멋있다. 모든 일은 그런 자신감에서 시작된다.
손가락 지문이 다 다르듯이 사람마다 바라보는 시선은 독특하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내 관점에 끼워 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가 내 생각만 중요하다 판단하여, 때론 현실과 타협치 않으려는 아집이 생길 수도 있다. 한 걸음만 물러나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이유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두 가지는 눈물과 웃음이라고 한다. 눈물에는 치유의 힘이 있고 웃음에는 건강이 담겨 있다. 기쁠 때 몸 안팎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행동이 웃음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특별한 스위치가 있다. 오직 자신만이 켜고 끌 수 있는 행복 스위치다. 기쁨은 바로 행복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누가 만들어줄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마음 속 행복 스위치를 다시 켜 보자. 밝고 환한 행복이 켜질 것이다.
예전에 후배가 보내준 글이 있다. 지금 알게 된 사실에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옛날에 알았던 사실이 변하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또한 내일이면 바뀔지라도 지금 알게 된 사실은 확실하다고 믿는 버릇 때문이기도 하단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은 옛날에 알았던 사실을
오늘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의 깨달음, 지혜, 희망은 오늘 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흘러왔고, 미래로 가야 확인할 수 있다. 조용한 삶이란, 과거를 무시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늘을 자랑하지 않는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시간 앞에 겸손할 줄 아는 삶이다.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시간이, 시절이, 세월이 무한히 흐르고 있는데 그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고 오만한 태도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삶은 필경 파경과 불행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가을이 이미 그 뒷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이즈막에, 아직 올 가을을 멋지게 장식할 이야기거리는 장만하지 못했다 해도, 차마 계절 앞에 부끄럽지 않은 진솔과 겸양의 자세를 상실하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는 거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올 가을 잘 살아낸 거라고 자부해도 된다. 부끄럽지 않은 가을살이를 갈무리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다음 계절을 기약하는 풍요가 가득 열리고 있는 가을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