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견과 진통끝 극적 성사
“오랜만에 하는 영수회담이라 의제도 정리하고 미리 사전조율도 해야 되는데 그것조차도 녹록치 않다.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26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영수회담이 마침내 성사됐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과 천준호 민주당 당대표 비서실장은 4월 26일 각각 브리핑을 열고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에서 ‘차담 회동’을 갖는다고 밝혔다.
당초 정치권에선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독대 회담을 기대했지만, 양측에서 세 명씩 ‘3 대 3 회담’으로 결론 났다. 대통령실에서는 정진석 비서실장과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민주당에서는 천준호 민주당 당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대변인이 각각 배석한다.
앞서 여당이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참패하고 대통령 지지율이 추락하자, 그동안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을 거부해 온 윤 대통령은 지난 4월 19일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 대표도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1주일간 두 차례 실무협의를 가졌지만, 의제 설정 이견으로 진척은 더뎠다. 대통령실은 의제를 모두 열어두고 만나자며 민주당의 요구에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여왔다.
앞서 이 대표 측은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채상병 특검법 수용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막혔던 물꼬를 튼 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다. 의제 조율보다 일단은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무(無)의제’ 회담 의사를 공개적으로 대통령실에 전한 것이다.
민주당의 키워드는 민생 회복과 국정기조 전환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 민심을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 민생 현장의 참혹한 현실을 제대로 전달하고,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요청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천준호 실장도 “정부가 그동안 보여왔던 일방적인 국정 운영, 오만, 독선적 태도 변화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부언했다.
물론 회담은 비공개이지만 모두 발언은 공개될 예정이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모두발언을 통해 내놓을 메시지에서 회담 전체의 성패와 윤곽이 예측될 전망이다.
이재명 대표의 조건 없는 영수회담이 성사된 것은 “22대 국회의 171석을 보유한 거대 야당으로서 민생 위기 해결을 위한 실질적 성과를 내는 국정 운영의 동반자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의도”이며, 대통령실이 수용하기 어려운 의제를 내세워 회동이 계속 늦춰질 경우 ‘야당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통상 영수회담은 대통령이 제1야당에 협조를 요청해야할 처지에서 성사됐다. 이번에도 4·10 총선 패배로 인적 쇄신을 단행하려는 윤 대통령은 국무총리 임명 등에서 이 대표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단독회담이 아닌 배석자가 있는 4대4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직접 실타래를 푸는 ‘탑-다운’ 방식의 협의는 기대하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 김대중 대통령때 최고의 영수회담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 간 만남은 ‘영수(領袖)회담’으로도 불리며 정국의 꼬인 실타래를 푸는 계기가 되었다. 여야 정쟁의 와중에도 양보와 타협으로 협치를 끌어내는 마당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첫 영수회담은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의 회동이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던 민중당은 당대표가 대통령과 회담한 뒤 임시국회를 소집해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 전쟁 파병 동의안을 다루기로 동의했다. 이후에도 박 전 대통령은 1970년 유진산 당시 신민당 총재를 두 차례 만나는 등 재임기간 총 5회에 걸쳐 영수회담을 가졌다.
1987년 6월 24일 이뤄진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 간 영수회담은 민주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김 총재는 회담 자리에서 4·13 호헌조치의 철폐와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장의 사면복권, 6·10 민주항쟁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을 강력히 요청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미온적이었다. 김 총재는 즉각 ‘영수회담의 결렬’ 발표와 함께 강경 투쟁에 돌입했다. 결국 5일 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위원이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110일 만인 6월 15일, 청와대에서 야당인 민주당 이기택 대표와 첫 회동했다. 약 2시간 25분 동안 단독으로 진행된 이날 회동에서는 개혁 입법, 북한 핵 문제, 금융실명제 등에 관한 폭넓은 논의가 개진되었다.
역대 영수회담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는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회담이 손꼽힌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의약 분업을 추진해 의사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고 한나라당은 이에 의약 분업 실시를 미루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양자가 만나 약사의 임의조제 금지를 포함한 약사법 개정에 뜻을 모으고 이후 의료계, 약계, 정부가 합의를 이루면서 의약분업이 실시됐다. 김 대통령은 이회창 총재와 총 7차례 영수회담을 가지며 남북정상회담, 미국 9·11 테러에 따른 민생 안정 조치 등에서 초당적 협력을 이뤄냈다는 평가다.
다만 의견차로 인해 끝내 합의가 불발된 경우도 다수다. 2003년 2월 25일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14일 만인 3월 11일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유민주연합 지도부와 만찬을 시작으로 야당과 회동했다. 이어 다음 날인 12일에는 박희태 대표권한대행 등 제1야당인 한나라당 지도부를 만나 경제 문제, 북핵 사태, 대북송금 특검법 등 국정 전반에 관한 의견을 개진했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9월 7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단독 회담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한나라당에 총리·내각 임명권을 주겠다는 ‘대연정’을 제안했고 2시간 30분간 이어진 회담에서 이 문제를 설득했지만 아무런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세 차례 회담이 열렸지만 소득은 없었다. 주된 현안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 논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였다. 손학규 당시 통합민주당 대표는 오히려 대통령의 사과와 소고기 수입 재협상 등을 촉구해 평행선만 달렸다.
2013년 2월 25일 취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46일 만인 2013년 4월 12일 민주통합당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등 야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북한의 도발 위협에 대한 초당적 협력을 당부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1965년 이후 양자회담 형식의 영수회담이 성사되지 않은 유일한 정부다.
가장 최근 영수회담은 6년 전, 지난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 간 만남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 전 대통령이 야당 대표에게 협력을 구하는 취지였는데, 이견만 확인한 채 돌아섰다. 남북정상회담 의제와 추경,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해임 문제 등이 다뤄졌는데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된 자리였다.
영수회담과 관련해 “두 분이 할 말 다 하고 들을 말 다 듣고 거기에서 구동존이(求同存異), 선이후난(先易後難). 쉬운 것부터 합의해서 계속 만나는 정례화의 그런 모습을 국민한테 보여주는 것이 두 지도자가 성공하는 길이다. 이번 여소야대 22대 국회에서 협치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선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직접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의미 있는 합의점을 도출하는 첫 성공 사례가 반드시 필요하다.
원본 기사 보기:
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