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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1.22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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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소봉(卲峰) 이숙진 ‘가을 앓이’
 
수필가 이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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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속을 후비는 풀냄새는 어머니 냄새 같아

혼자서 아프고 시리다고 어서 안겨보라고

삽상한 가을바람상현달 물그림자 운치에

 

 

 코스모스 한들한들 어머니를 찾아

 

▲  이숙진 수필가

초록이 멈칫하는 사이 구절초 향이 찻잔을 채운다. 들녘이 다투어 노랗게 채색되면, 바람도 어느새 붉은 산허리를 돈다.

 

올 한해 숙제로 남아 있던 어머니를 찾아가는 날이다. 길가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는 곳에 이르자 이상한 현기증에 꽃 멀미가 난다. 늘 멀미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단풍놀이 한번 제대로 못 해 드린 후회로 코끝이 꿀렁인 탓일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서로 묶어서 버티게 한 모습이 돋보인다. 다 쓰러졌다가도 어깨를 맞대고 기대면 살아날 수 있으니 농부의 지혜가 경이롭다. 인간 세상을 생각하게 한다.

 

마을 끝에 차를 세우고 푸른 콩밭을 가로질러 산속으로 들어간다. 고향 친지가 앞에서 낫으로 시야를 가릴 풀들을 제거하여 겨우 헤치며 올라간다. 까마득한 윗대 조상들의 비석이 즐비한 묘소를 지나는 발길이 허허롭다.

 

그 옛날에도 벼슬 한자리씩은 꿰차고 사셨으니 모두 선산에 모셔졌다는 생각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나간다. 콧속을 후비는 풀냄새가 어머니 냄새 같다. 어머니 집은 아늑하고 따사로워 꼭 어머니 평소 모습과 닮았다.

 

▲ 벌써 1990년초 어머니와 함께 필자(왼쪽)와 언니 이난훈(오른쪽   


 

구순을 훌쩍 넘기고 낙엽이 가라앉듯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구월을 이틀 남긴 2009년 8월 29일 내 어머니는 이 세상 소풍을 마치셨다. 우리 부부가 미국 가서 몇 달 살다가 예정보다 한 달 앞당겨 귀국한 후 닷새 만에 눈을 감으셨다. 아무 탈 없이 구순을 훌쩍 넘기고 낙엽이 차츰 가라앉듯 자연사하신 거다.

 

모두 막내딸을 기다린 것 같다고 하니, 갑자기 귀국하고 싶던 일에 거스를 수 없는 어떤 순리를 느낀다. 때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운명의 장난인가. 계획된 운명인가. 굳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들먹여 운명에 대처하는 법을 따르지 않았어도 왠지 귀국하고 싶어진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내드리는 그 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붉지도 파랗지도 못하고 누르스름했다. 그래서인가 해마다 가을 초입이면 병이 도진다. 낙엽이 뒹구는 곳이면 어디든 정신없이 걸으며 평정을 잃고 유난히 가슴속이 억새처럼 서걱댄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어머니를 찾아 몸속 수분을 다 쏟아야 가을 앓이가 끝날 것 같아 훌쩍 떠나 온 거다.

 

사방을 둘러보니 가까운 시인이 산행 끝에 썼던 글이 생각난다. ‘가을 심장에 꽂힌 화살에 선홍으로 물들어버린 산야. 그 뜨거운 외침으로 시월 산이 외친다. 혼자서 아프고 시리다고, 어서 오라고, 안겨보라고.’ 어쩜 지금 나와 그리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어머니에게 넉장거리로 엎드려 피에로처럼 겉으로는 웃지만, 속울음을 운다. 어머니를 안은 그 포근함, 그 새뜻한 냄새와 익숙한 아우라가 안정감을 준다. 이 가을에는 더욱 차분해져서 밤톨같이 단단하고 옹골찬 지혜를 가지겠다고 어머니께 다짐한다.

 

내 꼴이 꼭 퇴락한 초가지붕 같아

 

내려와서 고향 집 종산정사에 들렀다. 초가지붕이 움푹 들어가기도 하고 삐죽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툇마루에는 먼지 사이로 음각된 참새 발자국이 쓸쓸하다. 마당에는 앞 뒷산에서 날아 온 낙엽이 카펫을 깔아놓은 듯 푹신하다. 나의 세월과 사뭇 닮았다. 어쩌다 벌써 중년을 훌쩍 넘어선 내 꼴이 꼭 퇴락한 초가지붕 같으니.

 

민속자료로 지정된 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고마운 행정인가. 아마 가을 추수가 끝나야 지붕을 이을 계획인 것 같다. 손녀를 마루에 나란히 앉힌 그림이 아주 쏠쏠한 흔적이 되겠다.

 

예나 지금이나 집 옆의 배롱나무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흔든다. 앞마당에는 전에 없던 마로니에 나무가 크고 푸른 잎을 펄럭이며 알밤 같은 열매를 떨어뜨리고 있다.

 

옛날에 그 크던 감나무와 은행나무는 거의 고사하고 쪼그라들었는데, 조카가 태어나던 해에 심었다는 마로니에만 싱싱하게 수호 장군처럼 집을 지키고 있다. 식물도 수명을 거스를 수 없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자연의 이치를 어찌하겠는가. 별이 되신 어머니도 늙어가는 나도 하나의 자연인 것을.

 

이웃집 담장 안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황소 똥만 한 홍시가 떨어져 널브러져 있어도 주워 먹을 사람이 없다. 마루에 앉았다가 홍시가 떨어지는 소리가 하면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게 뛰어가 줍던 어릴 적이 그립다. 길가에 은행이 노랗게 떨어져 냄새가 진동하니 또 다른 풍경이다.

 

서울 우리 아파트에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산책길이 즐겁다. 은행이 질퍽하게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줍지 않는 색다른 풍경이 시골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 단면이다. 밤나무 밑에 밤이 소복이 떨어져 있어서 몇 알 줍고 있으니, 친척이 서너 되나 되는 밤을 나누어 준다. 이런 훈훈한 시골 인심이라니.

 

친척 아우는 나를 태우고 풍산읍(豊山邑) 들판을 한 바퀴 휘돈다. 누나는 작가라 감회가 남다를 것이라며. 벼가 벌써 노랗게 고개를 숙이니 그야말로 황금벌판이다. 자기 경작물을 보여주며 배추를 한 포대 뽑고, 고추도 필요한 만큼 가져가란다. 이 넉넉한 가을이 마냥 흐뭇하다.

 

옆 비닐하우스에 대나무 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생강이란다. 평생 처음 보는 생강나무라 기이하여 셔터를 눌러댄다.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는 하천작용과 침식작용으로 갯벌이 평야가 된 흙이라 깊이 뿌리박는 우엉이나 마 종류가 잘 자란단다. 하긴 옛날에도 무가 크고 결이 곱던 것이 그 이유였다.

 

지방자치제가 되고부터 세수가 풍족한지 가로수도 배롱나무가 많다. 안동지방에 고택이 많고 민속자료가 많으니 배롱나무가 훨씬 운치가 있긴 하다.

 

삽상한 가을바람이 뺨을 때리지만

 

저녁에 안동 시내 월영교(月映橋) 앞 식당에서 헛제삿밥을 먹었다. 데리고 간 어린것들의 호기심이 찰랑대는 까만 눈동자가 이채롭다. 빨간 안동 식혜를 선뜻 입에 대지 못하고 상어 고기를 처음 본다고 도리질을 한다. 덕분에 빨간 식혜를 나 혼자 실컷 먹는 호사를 누렸다.

 

월영교에는 관광객이 많아서 복잡하지만, 밤이 되니 조명이 보태어 야경이 최고 중의 최고다. 외국의 어느 다리보다 훨씬 길고 멋지다. 어린 것들이 월영정(月映亭)에서 막춤을 추어대니 귀엽고 유쾌한 밤이다. 삽상한 가을바람이 뺨을 때리지만, 다리 밑에 빠진 삐뚜름한 상현달 물그림자의 운치에 취해 추운 줄 모른다.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희뿌연 물안개 사이를 걷는 이 평화로움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가 삶의 깊은 소리처럼 가슴속에 스며든다. 아들 내외와 다리를 건너 빨갛게 물든 가로수 아래서 경상도 북부지방 유교의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숙소로 들어와 고향 친구가 섬섬옥수로 만들어 온 식혜를 마시며, 오래 익은 완숙된 정을 느낀다. 그녀나 나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가을과 닮았으니 떠나는 가을을 붙잡고 싶다. 사철의 중간에 이 계절이 배치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 꽉 찬 가을날에 마음을 열어 가을 앓이를 원 없이 한 날이다.

 

프로필

- 국제펜 한국본부회원, 한국문인협회회원

- 문학동인 글마루 회장 역임.

- 실버넷뉴스 기자 역임.

- 저서: 가난한 날의 초상, 해바라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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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20 [14:36]  최종편집: ⓒ 해피!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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